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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복지모델과 공동체: 비공식적 복지의 발달과 유교 전통 - 최연식 연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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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년도 ~ 종료년도 2010 ~ 2013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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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목적 및 배경

 

 한국에서 복지 체계의 취약성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고용 이외의 다른 복지제도가 부재했던 한국사회에서 외환위기가 가져온 대량실업이라 는 경제적 충격과 이어진 사회적 충격은 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성장 위주의 산업화 정책이 분배의 문제와 항상 모순을 보여왔던 한국의 산업화의 역사적 과정을 생각해보면, 내부적인 차원에서 복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 위기 이후 복지에 대한 관심의 폭발은 경제위기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내부로부터의 내재되었던 성장과 분배에 관한 문제 제기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IMF 구제금용이라는 위기 또는 기회를 동시에 안고 시작한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적인 차원에서 복지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에서 복지정책의 양적 팽창과 관계없이 그것의 성격과 효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이 신자유주의적 복지이념을 강하게 수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복지국가로부터 후퇴하는 양상을 지적하고 있다(정무권 2002; 조영훈 2002; 신광영 2002). 반면 다른 진영은 복지에서 국가의 역할이 증대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복지국가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성경륭 2000; 김연명 2002).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관점과 복지국가의 관점 모두 현재 한국에서 복지 정책이 실패했다는데는 전반적으로 공통된 입장을 견지한다. 빈곤은 오히려 심화되었고 소득불평등 역시 악화되었다는 지표만이 가득하다([그림 1] 참조).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복지정책의 실패는 이제까지의 복지모델에 대한 논의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따라서 지금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복지 모델은 과연 무엇인가를 새로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림 1> 한국의 지니계수 변동(1991-2010)


 

출처: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bok.or.kr)

주: 지니계수는 1990-2002년 도시가구(1인 및 농가제외), 2003-2005년 전국가구(1인 및 농가제 외), 2006년 이후 전국 전가구.

 

 이러한 상황에서 본 연구의 일차적인 목표는 한국사회의 복지 현실에 대한 현실적 고찰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복지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러한 복지 제공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복지의 주체는 국가, 시장, 공동체로 거칠게 구분된다(Polanyi 1957: 홍경준 2000a). 그리고 이들 세 주체의 복지 기능은 역사적으로 혼재되어 왔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들은 한국적 현실에서 다른 국가의 경험과는 다르게 가족이나 친족 등 공동체에 기반한 복지기능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홍경준 1999). 국가나 시장이 근대화의 진행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복지 주체라면, 그에 비해 두레, 계 등의 공동체에 의한 상호 부조와 같은 복지 기능이 두드러지는 것이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기 때문이다(정진영 1991; 전종한 2002; 전상인 2004).

 

 한국의 복지 현실에서 다양한 공동체 가운데 특히 가족이 복지의 재원 마련과 제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홍경준 2002). 최근에 여러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족 중심 복지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의 경제발전과 궤를 같이 하여 “동아시아 복지모델”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연구들로 서구와는 다른 동아시아만의 특수한 복지 모델을 상정한다(Goodman, White and Kwon 1998; Croissant 2004). 한편 이와는 달리 기존 서구 복지국가 모델의 틀 안에서 “가족책임주의” 또는 “가족주의”라는 개념을 새로 추가한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Esping-Andersen 1999). 마지막으로 국내에서는 연(緣)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연결망(연줄망) 이론의 관점에서 가족 복지를 연구하기도 하였다(홍경준 2000).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 대부분은 한국의 비공식적 복지제도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복지제도의 발전과 함께 소멸되거나 약화되리라 예측하고 있다. 혹은 그것의 지속성을 인정하는 연구조차도 이러한 비공식적 복지제도들을 국가복지와는 유리된 채 작동하는 별개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함으로써 다양한 층위에 존재하는 복지제도들 사이의 배태성 또는 연관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탐색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본 연구는 첫 단계에서(1-3년차) 공동체의 복지 기능이 이미 하나의 자율적인 사회적 메커니즘으로서 한국 복지의 역사적 경로를 형성하여 왔고, 이러한 경로 의존적 특성이 이후의 여러 제도, 특히 국가의 복지제도의 형성과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왔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다음 단계에 서는(4-6년차) 첫 단계에서 파악한 한국 복지의 특징과 성격을 같은 유교 문화권의 국가들, 즉 대만, 일본,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의 복지제도와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 하고자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7-10년차) 유교 문화권 국가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특성을 전혀 다른 문화권의 대표적인 복지국가들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특히 스웨덴, 미국, 독일 등 복지국가 유형론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논의되는 국가들과의 체계적인 비교분석은 한국, 나아가 동아시 아 복지모델의 고유한 속성을 규명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Esping-Andersen 1990). 그리고 이러한 비교는 개별 국가의 복지제도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서구 복지모델로 수렴해 갈 것이라는 기존 학계의 가설을 검증해 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윤도현 2000; Guillen 2001). 나아가 본 연구는 1단계→ 2단계→ 3단계에 이르는 단계적 접근을 통해 유교 전통에 기반한 ‘동아시아 복지모델’의 성립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것이 전 지구적 변화의 한 가운데 놓인 한국 복지제도의 미래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도 전망해 보고자 한다. 

 

 

 

2. 연구내용, 범위 및 방법

 

 1단계에서는 한국적 복지현실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복지, 건국 이후의 복지,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의 복지를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건국 이전 의 복지에 대한 연구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지만, 현대적 복지인프라가 부분적으 로 도입된 일제시대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될 것이다. 다음으로 건국 이후의 복지는 무상원조 를 중심으로 기초적인 복지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던 이승만 정부와 현대적인 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박정희 정부를 포함하여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마지막 시기 는 복지제도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외환위기 이후부터 최근까지를 포함한다. [표 1] 는 본 연구의 단계적 연구계획을 정리한 결과이다.

 

[표 1] 연구문제의 단계별 발전계획


 

 

 ​본 연구는 연구의 효율성 제고를 위하여 일제시대의 복지 제도를 별도의 독립적인 연구 주제로 설정하지 않았다. 일제시대의 복지제도는 대체적으로 종교단체에 의한 공동체적 복지와 조선총독부에 의한 제도적 복지가 중첩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는 일제시대 복지제도를 그 이행기적 특성에 주목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전 시기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또한 외환위기 이후의 복지제도 발전 역시 1, 2차 년도의 논의에서 제외한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외 환위기 이후 포괄적인 복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이전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제도적 단절 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복지개혁의 상당수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이 성격에 대한 논의 역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정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김 연명 2002). 따라서 3차 년도에서 한국형 복지모델을 모색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외한위 기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전반적인 복지체제에 대한 평가 및 미래에 대한 전망을 시 도해 보고자 한다. 연구를 위해 본 연구에서 임의로 구분한 세 시기의 세부 연구 내용과 연구 방 법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복지모형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연구 (조선시대 ~ 일제시대) 


  1)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 복지의 발달 

 본 연구의 1차년도에는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가족과 공동체에 기반한 복지모델의 역사 적 모습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가족주의는 거의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한국 전통사회에서 가족주의는 오랜 농경적 조건에 더하여, 가족주의를 윤리적, 이념적, 제도적으로 강화한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여타 사례와는 다른 강렬하고도 독특한 양상을 보인 다. 가족은 윤리적 절대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제도적․기능적으로도 여타 사회집단에 비할 수 없는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주의 전통에 입각해볼 때 전통시대 가족이 행한 복지의 기능은 ‘족계(族契)’ 의 경우에서 잘 나타난다. 족계 또는 종계(宗契)는 혈연을 공유한 가문의 구성원들이 상호 네트 워크를 형성해 가문 대소사를 처리하고 가문의 이익과 발전에 힘을 합하며 궁극적으로 가문의 공동체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족계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가문 구성원 상호간의 길흉부조(吉凶扶助)와 그를 통한 혈족 간의 친목도모에 있었다. 즉 족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는 가문 내 상호부조의 기능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가족복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의 전통사회는 가족주의와 더불어 지역 기반의 ‘공동체주의’ 역시 견고한 형태로 발달시켜 왔다. 즉 가족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논리, 그리고 그와 연관된 실천의 양식들이 향촌 차원으로 전이되어 향촌 자체가 하나의 유사확대가족의 범주로 수용되었고, 이로부터 향촌 단위의 강한 공동체주의가 배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 전통사회에서의 공동체주의 는 대개 가족주의의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그 주요 내용이 향촌 차원으로 확대 적용된 일반화된 행위원리(문화양식)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 복지의 대표적인 예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향촌 차원에서 구축한 공동체적 자치기구인 향소(鄕所) 그리고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향촌을 도덕적으로 교화하고 이상적인 자치 공동체를 실현하려 한 유교적 의미의 사회운동(제도)인 향약(鄕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정진영 1998; 박익환 1995, 254). 향소, 향약, 족계 등 주로 지배층인 양반의 복지 제도 외에도,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향도(香徒)와 이후의 두레는 일반 농민들에게 직․간접적인 복지 기능을 제공하 였다(이태진 1989). 향도는 자연촌락을 단위로 한 공동체조직으로서 주로 공동 노역, 마을 잡역, 민간신앙이 가미된 마을 제사, 관혼상제의 공유와 그 부조를 수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이해준 1992). 향도가 보여준 공동체적 부조는 비록 자연발생적이고 조야한 수준이긴 했지만, 일반 민중 의 삶을 담보해주는 최소한이자 거의 유일한 복지기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한국 전통에 내재된 공동체적 복지의 주요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레는 전통시대(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 민조직으로서, 그 기본 성격은 공동노동조직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기한 향도의 여러 가지 기능 중 공동노동의 기능을 특화한 제도가 두레인 셈이다. 그러나 두레 역시 공동체 내부에서 중요한 부조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을의 과부, 노인, 환자집 등과 같이 공동노동에 참여할 노동력이 없는 경우, 두레는 그들의 농사를 대신 지어주는 강한 부조적 성격을 견지하고 있었다. 두레 조직에 들어간다는 것은 공동노동의 의무를 부담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유사시 두레 조직의 부조를 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사회보장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공동노동조직인 두레 역시 전통적 공동체의 하나로서 그 내부에는 예의 전통적 복지 개념이 동반되고 있었던 것이다. 

 

  ​2) 공동체의 비공식 복지와 국가의 공적 복지의 관계

​ 전통사회에서 국가를 통한 공적복지는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가? 그리고 국가의 공적복지와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 복지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기존의 연구들은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복지국가의 수동성을 유교적 국가전통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Wong 2004).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대민 복지제도들이 존재했다는 증거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진휼(賑恤) 정책인 환곡(還穀)과 의창(義倉)은 물론, 곡가조정(穀價調整)을 위하여 국가에서 설치한 창고인 상평창(常平倉) 역시 거시경제정책을 통한 케인즈주의적 개입이 가지는 복지국가적 성격을 추적해 보기에 충분하다. 이외에도 혜민국 (惠民局), 대비원(大悲院), 제생원(濟生院) 등의 대민 의료기관들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복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전통시대의 국가가 복지에 대해 완전히 무능하지도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있다.

 ​이러한 가족복지의 전통은 한국의 전통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서구 유럽의 전근대사회에서 역시 복지국가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Ringmar 2005). 즉 복지국가 역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심화와 함께 출현한 비교적 최근의 개념이기 때문에 서구는 물론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복지국가의 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전통 한국사회에서 국가복지의 부재를 위와 같은 맥락에서 현실적 부재로 개념화하기보다는 '불개입의 개입'이라는 개념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즉, 전통사회의 국가는 의도적으로 복지기능에 개입하지 않은 것이며, 자치적인 향촌조직들의 활성화를 간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자발적인 상호부조 기능을 통해 복지수요가 해결되는 것을 이상적인 정치모형으로 지향했다는 가정 하에 본 연구에서는 이론적으로 유교적 정치질서 원리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는 한국 전통국가의 복지개입/불개입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더 욱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즉 복지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행정력과 재정역량의 부족 이라는 차원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으나, 본 연구는 가족과 공동체의 자율적인 복지기제를 보장 하고 지원함으로써 유교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현대국가 가 복지개입을 통해 정당성을 찾는 반면, 전통시대의 조선의 국가는 복지 불개입을 통해 정당성 을 추구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비공식 복지영역과 공적 복지영역 사이의 상호보완성과 관련성이 전통사회에서 구조화되어 있는 메커니즘을 이해함으로써 두 영역간의 복지기능이 서로를 유지가능하게 했던 메커니즘을 확인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2. 현대 한국사회의 복지현실 연구 (건국이후 ~ 외환위기 이전)

  1) 가족과 공동체 중심의 비공식 복지의 특성​'

 다음 단계(2차년도)에서는 앞서 살펴본 전통사회 복지의 고유한 성격이 산업화와 근대화와 함께 변화하고 수용되어 온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즉 현대 사회에서 비공식 복지영역의 역할을 규명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가 한국 현대사회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볼 복지의 영역은 앞서 전통사회와 마찬가지로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적 복지 영역과 가족 이외의 공동체들을 통한 복지 부문이다.

 여기에서 본 연구의 가설은 전통사회에서는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 복지 부문이 지배적이었다면, 현대사회로 이행됨에 따라 가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복지의 축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가족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역할을 유지해 온 반면, 전통사회에서의 공동체의 역할을 대신해 국가가 복지제공의 주체로 등장했다. 이는 국가의 복지제도가 확충되어감에 도 불구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한 상호부조가 여전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친구나 가족이 병에 걸렸을 때 비용을 갹출한다든지, 친구, 동료나 가족이 영전하거나 퇴직할 때 전별금, 위로금을 갹출하는 관례는 물론, 가족 친지에 대한 생계를 떠맡는 (노부모, 어린 손자, 병든 친척 등) 사례들은 서구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상호부조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족 이외의 공동체 조직을 통한 복지의 경우는 어떠한가? 공동체 중심의 비공식 복지 역시 위기 시에 현대적 형태로 재현됨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97년 외환 위기시 전국적인 금 모으기 운동은 물론, 2010년 천안함 사건 유족들에 대한 전국민적 성금 모금, 위문장병위로금 및 각종 비용 봉급 갹출,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경조사 비용 등이 대표적이다. 이 사례들이 가계에 막중한 부담이 되고 있음은 각종 언론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모두가 실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과거와 같은 공동체의 상호부조 전통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기시를 제외한다면 일상화된 형태의 공동체 복지가 과거와 같은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공동체 복지는 어촌계(최종렬․정병은․황보명화 2007), 종친회(최우영 2006c), 동창회(류석춘․왕혜숙․박소연 2008) 와 같은 형태로 명목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이 역시 이러한 전통적 사회조직이 갈수록 약화일로 에 있다는 점에서 그리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고 판단된다.

 

  2) 비공식 복지제도와 국가 복지의 배태성(embeddedness)

 ​앞서 본 연구는 가족, 친족 이외의 공동체 복지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가족과 공동체를 대신하여 국가 중심의 공적 복지제도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는 국가복지 제도의 발전, 또는 복지국가의 확립과 공고화 과정 역시 비공식 영역에서의 복지기능들과 유리되어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두 현상이 상호 관련성 아래 발생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앞서 서술한 전통사회에서의 비공식 복지와 국가복지 사이의 상호 보완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 영역의 복지가 공적 영역의 근대적인 복지제도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상호배태성을 견지해 감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장은 유교전통이 복지국가의 출현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기존 관점(Wong 2004)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동시에 이는 전통적 유산이 근대적 제도 확립에 장애로 작용하기보다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반증해 보는 시도가 될 것이다(Chan 2003). 그리고 본 연구는 이러한 가설을 경험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공적인 복지제도들 속에 녹아 있는, 또는 공적 복지제도들의 기틀을 제공한 비공식 복지제도들의 뿌리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통해 공동체 수준에서 자체적으로 복지 수요에 대응해 왔던 뿌리 깊은 자치의 전통과 제도적 관성, 그리고 국가의 복지 불개입의 관성이 국가복지 발전궤적에 있어서 일종의 제도적 경로의존성으로 작용함을 규명해낼 것이다. 

 ​한국의 사회보험은 독특하게도 기본적인 설계에 있어서 가족을 중심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피부양자 제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가족이 국가와 개인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개인과 국가가 복지제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모델과 구별된다. 이러한 특이성은 피부양자 제도의 범위에 대한 비교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가족을 강조하는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대만은 물론, 국가복지의 틀 안에 가족을 포섭하고 있는 보수주의 복지모델에 속하는 독일과의 비교에서도 한국의 복지제도에서 규정하는 가족의 범위가 매우 포괄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이용갑 외 2005).

 ​가족주의는 비단 사회보험의 최초 성립시기에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주의적 복지수요는 이후 해당 제도가 확장, 발전해 나가는 동력으로도 작동하게 된다(이미숙 2008).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사회보험제도 발전의 동력은 기존의 연구들이 제시하고 있는 산업화(Wilensky 1975), 노동세력의 조직화(Korpi 1983), 국가역량(Skocpol 1992) 등과 같은 요인이라기보다는 바로 가족주의적 요구였다. 즉 서구에서는 복지국가의 발달이 시민권의 확장과 연계됨으로써 투쟁의 전선이 만들어진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시민이기보다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야 복지의 수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즉 가족 성원 여부가 시민권의 획득 여부와 직접 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에서 국가와 공동체의 역할이 모두 변화할 것이 예상된다([그림 2] 참조). 그러나 본 연구는 이러한 복지모형에서 가족 및 공동체라는 복지의 주체 또는 대상 이 과거와 현재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재분배적 복지의 주체가 과거 ‘공동체’에서 현재의 ‘국가’로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여전히 중앙 집중적 재분배 주체와 개인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예상되는 결론을 확장 시켜 본다면, 오히려 개인의 복지수요에 따라 가족이 국가 또는 공동체라는 제도를 선택적으로 활용한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

[그림 2] 한국의 복지모형: 전통과 현대의 비교



 

 

3. 한국 복지모델의 특수성 및 변화전망 연구 (외환위기 이후) 

 3차년도에는 2년간의 연구를 통해 도출될 한국 복지모델의 전통과 현대에 관한 체계적인 비교연구를 바탕으로 외환위기 이후부터 최근까지 한국형 복지 모델이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 1997년 경제위가와 IMF 구제금용이라는 위기 또는 기회를 동시에 안고 시작한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복지문제에 접근했다. 물론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국민의 정부의 복지정책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복지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오히려 복지국가로부터 후퇴했음을 비판하고 있다(정무권 2002; 조영훈 2002; 신광영 2002). 다른 진영은 제도적 차원에서 복지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증대된 측면을 논하면서 복지국가로 이륙했다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성경륭 2000; 김연명 2002; 다케가와 쇼고 2006). 그러나 이 시기 정부의 복지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든 이들 논쟁의 핵심에서 비교의 축은 언제나 서구의 복지국가에 놓여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복지제공의 주체로서 시장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온 사실이 간과 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에 대해 복지국가의 후퇴라고 주장하는 연구들은 신자유주의적 복지이념의 수용을 문제시하면서도, 복지제공에서 시장 영역이 확대되어온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연금시장은 물론 의료시장, 노인보 살핌 등의 영역에서 시장영역의 복지가 지난 10여 년 간 폭발적으로 증가해왔다. 물론 이 과정 역시 한국은 개인이나 가족이 시장에서 보험이나 복지서비스를 제공받는 단위가 된다는 점에서 서구의 다른 복지모델과 구분된다. 이는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복지제공의 주체가 공공에서 민간으로 전환된 민영화와도 다르고, 주로 사용자가 주체가 되어 시장에서 보험을 구매하는 미국과도 또 다르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시장을 통한 복지기능은 시장의 발달과 함께 꾸준히 그 역할이 증대 되어 왔다.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개인들은 추가적인 복지수요 및 위기대비의 필요성 을 인식하게 되었고, 시장중심의 복지가 실질적 차원에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러한 해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에서 시장을 통한 복지의 발전 역시 가족주의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복지시장 구조에서 위험에 대한 개인주의적 대처방식인 개인연금이나 저축성 보험보다는 수혜자가 자식이나 부모로 지정된 보험 또는 상조회 등이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에서 전반적으로 외환위기 이후 하위 계층에게는 국가복지가 크게 확대되었지만 중상위 계층의 경우 시장복지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계층에게 공통적인 특징은 가족이 제공하는 복지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국가복지는 물론 시장복지에서도 전통사회와의 연속성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음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